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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라는 오브제

채집가 김영섭
작가 김영섭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리(소음, 언어 포함)’ 라는 소재로 설치 작업을 한다. 작가는 독일로 유학 가기 전 10여 년 넘게 풍물패를 한 경험 탓인지, 유독 ‘소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소리를 내는 악기들을 오브제로 삼아서 설치를 한 경험이 있을 정도이다. 독일 유학전 작가는 한국에서는 회화를 전공하여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고, 1999년에 관훈갤러리에서 <-화-장-수-술->의 제목으로 6000여개의 같은 크기의 작은 패널에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의 초상을 오브제화시켜 표현한 개인전도 하였다. 독일 유학시절부터평소에 관심 갖던 ‘소리’ 작업을 시작하였고, 2007년 한국에 귀국하여 지금까지 김영섭은 온갖 일상의 소리, 언어, 소음들, 청각행위들을 시각화시키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 사회의 소리들은 현대인의 삶을 반영한다. 재현한다기보다는 재현 불가능한 부분까지도 드러낸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소리들은 사람들의 욕망의 시스템과 관계한다. 그래서 그것은 소망, 꿈, 열망, 충동, 아쉬움, 절망, 상실, 성찰 그리고 그것의 리비도 등 다양한 표정을 담게 된다. 우리 삶과 그 속에서의 소통이란 것은 언어-소리를 통해, 때로 속삭임과 같은 소리에서, 심지어 들을 수 없는 굉음에서도, 매체 소음들 사이에서, 잘 들을 수 없는 시끄러운 소음들 사이에서, 인간이 내는 소리가 아닌 어떤 자연의 소리를 통해서 조차도 불가해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과 역동적 관계에 있는 의식적으로 들리는 혹은 무의식적으로잠재된 이 소리의 세계를 무의식적 소리의 세계, 혹은 그것의 틈새들, 작가의 표현대로 ‘도시 사회 문화의 잉여물들’이라고 불러보아도 좋을 것 같다. 김영섭은 이러한 틈새들, 잉여를 놓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이 틈새, 잉여를 오히려 가시화시키거나 무대화시킨다. 온갖 소리들을 채집함으로써 말이다. 그가 한국에 귀국하여 보여준 2007년부터 진행한 몇 차례의 개인전(2007년 쿤스트독 갤러리에서의 <맛있는 식사>, 2008년 토포하우스에서의 <정원에 대한 새로운 기억>(서울 시립미술관 SeMA 지원전) 개인전 등)을 통해서 이런 틈새들 속에서 소통(불)가능한 어떤 측면들, 현대 주체의 욕망의 초상들을 반영적으로 선 보인 바 있다.
갤러리정미소에서의 개인전 설치 전시는 김영섭 작가가 한국에 귀국하여 실시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이 작업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딱 한 단어로 이야기해주십시오” 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터뷰한 내용을 오브제화하여 설치로 가시화 시키는 것이다.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매우 명확하게 한 단어로 자신의 꿈을 대답할 것을 요구받았다. 작가는 독일 유학 시절 중, 2005년 당시 작가가 거주하고 있던 자아부릭켄 도시에서 사람들의 ‘소원’에 대한 작업을 실행한 바 있는데, 그것이 현대인의 꿈, 소원에 대한 프로젝트의 출발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작가가거주 혹은 방문하게 되는 도시마다 계속 실행할 수 있는 지속적인 성격의 것이다. 이번 서울에서의 프로젝트는 서울이라는도시, 장소, 그리고 현재 이곳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초상, 혹은 정체성, 그리고 현실-이면의 (목)소리 응시차원을 드러내는 작업이 된다.

강한 욕망 추구형 한국사회, 그것의 리비도를가늠하기
김영섭의 자료를 보다가 작가가 독일 유학을 가기 전인 10년전 관훈갤러리에서 했던 개인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보기에 김영섭의 관심사는 당시 수 천 개의 오브제들로써 온갖 인물 형상을 제각각 표현했던 10년 전 개인전 때나 인터뷰하면서 사람들의 꿈을 묻고 다니는 지금의 프로젝트에서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김영섭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을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그 표정을 살피며, 거기서 나는 소리들에 살며시 귀 기울이는 관찰자이자 채집자인 것이다. 지금껏 김영섭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 그것의 속도, 그것의 외양, 거기서 나오는 온갖 소리들을 통해서 김영섭은 현대사회를 꾸준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방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주로 시각매체를 사용할 때인 10년 전, 김영섭은 보다 팝아트적 성격의 설치미술을 하였다고 할 수 있고, 지금 소리매체를 사용할 때는 좀 더 미니멀리즘적 방식을 선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전시 모두 상통하는 측면은 전시 설치 장면은 ‘반복’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영섭은 여기서 ‘채집’과‘해체’ 와 ‘재구성’의 묘미를 살릴 줄 안다는 것이다.

그가 다양한 인물상들(6000여 개 이상) 오브제들을 전시장 벽면 가득 메웠던 10년 전의 한국의 1990년대는, 뒤늦은 민주화의 길에 들어섬과 동시에, 신자유주의체제로 성급하게 들어섰던 시기이자 그 여파로 일어났던 IMF 체제를 막 극복하면서 글로벌화되는 역동적 시기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문화적 측면에서는 포스트모던의 다양성이랄까, 개인의 자유랄까, 개성이랄까 하는 덕목들을 다소 비자발적으로, 다소 획일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김영섭이 채집-오브제화 시킨 6000여개라는 숫자의 다양한 인물 초상 오브제들은 이러한 역동적인 다양성, 다양성을 위한 어떤 (획일적) 열망들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한국은 80년대까지의 군부독재시절까지 억압되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들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발현되었으며, 급격한 경제발전을 통한 성장 위주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들이 한꺼번에 충돌하고 있었던 비현실적이고 과도할 정도로 낙천적인 시기였던 것이다.
물론 이후 10년 동안 한국은 IMF도 그 어느 케이스보다 일찍 극복하였으며, 경제적으로 매우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현재의 글로벌 위기에서도매우 꿋꿋하게 성장을 위해 열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나라중 하나가 되어있다. 행복에 대한, 그리고 잘 살고자 하는 것에 대한 획일적인 소망 추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망 추구의 반복과 지속에 내재된 어떤 충동이란 것은 과도한 욕망의 추구속에서 오히려 억압된 채로 반복,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더욱더 강렬한 어떤 리비도로써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김영섭의 ‘꿈’에 대한 프로젝트는 한국의 2009년 시점에서도 지속, 반복되고 있는 욕망추구의 실제와 이면을 모두 묻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지금은 여기서 그런 욕망을 지속적으로 추동하고 있는 ‘리비도’혹은 ‘강도’를 가늠해 봄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하면서도 획일적으로 ‘반복’하는 현대 사회의 증상들을 발견해보는 것이 이 전시의 의의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김영섭의 설치 방식을 통해서 이 다양-획일성의 강도는 반복 재생되는 소리들의 무대화를 통해 다소나마 강조되기 때문이다.

‘꿈-(목)소리’를 무대화하기
김영섭의 질문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에 대해서 (작가의 요구대로) 정확하게, 심사숙고하여, 진정으로 자신의 꿈에 대해서 딱 한 단어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 꿈 외에 그 어떤 것도 절박해보이지 않는, 그런 꿈에 대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 꿈에 우리는 매달려있고, 그 꿈을 향해 내달리고 있으며, 그 대답에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환상의 모든 것을 걸게 된다. 그 꿈-대답은 우리를 ‘묶는다.’ 마치 김영섭의 전시 부제목처럼 말이다.
일반적인 김영섭의 전시 설치 방식은 매우 미니멀하면서, 최소의 재현성(이것은 관객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일지 모른다)만을 남기는 방식이다. 대부분 사운드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들인 스피커 케이블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최소한의 재현적 성격을 갖는 오브제 형상들(이번 전시에서는 화분)로 소리들을 재생하여 들려주는 도구(스피커)로 등장한다. 김영섭이 채집한 소리들에서 노이즈를 제거함으로써 그 소리들 자체를 미니멀화하고, 오브제화하여 전시장에서 재생한다.
이번 갤러리정미소에서의 설치 방식을 살펴보면, 우선 작가는 전시 공간에 일반적으로 좀 높다고 느껴질 만한 175m의 높이의 선반을 설치한다. 여기에, 좀 많다고 느껴질 만하며 전시장을 꽉 채운다고 느껴질 만한 45개 정도의 스피커 케이블-화분 형태들이 일렬로 늘어서게 된다. 이는 편안한 느낌의 설치방식은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목)소리들은 일체의 잡음이 제거된 ‘꿈’ 소리들뿐이다. 전시에서 사용되는 모든 형태들, 이미지들, 그리고 소리들(이번 프로젝트에서의 꿈-(목)소리들)은 모두 최소화시키고, 반복이란 형식으로무대화시킨 이미지-소리-오브제들이다. 인터뷰에서 ‘나의 꿈은 이것이야’ 라고 발화시킨 꿈들이 오히려 전시장에서는 반복하여 관객들에게 ‘당신의 꿈은 이것입니다’ 라는 얼굴 없는 (목)소리로 재생되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 프로젝트 는 내가 보기엔, 유독 김영섭 여타의 소리 작업 중에서도, ‘상징체계’를 무대화 시키는 작업인 듯 하다. 이 무대는 너무도 투명한 거울과도 같은 기능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매우 불편한 기능을 한다. 즉, 한 편으로 이 프로젝트는 ‘꿈’을 매개로 하여 우리 사회의, 삶의 초상을 너무도 분명하고 투명하게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일체의 잡음(일상성)이 소거된 ‘꿈’이란 단어들의 반복된 재생 소리는 오로지 ‘꿈’에 대한 높은 강도의 투명도를 강조한다. 그러다보니 이것은 오히려 어딘가 왜곡되어있는 상 자체를 보여주는 그런 투명도가 되는 것이다. 매우 일상적인 소망이었던 꿈이 전시장에서는 오히려 일상성은 소거되고 낯설고 비현실적인 실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이제 현실의 상징적 시스템만을 앙상하게 반영하는 거울-대상이 된다. 게다가 우리가 의도했건, 무의식중에 튀어나왔건, 아니면 평생 염원했던 어떤 것이건, 그 꿈이 명확하게 ‘꿈’만의 (목)소리로 발화되는 순간, 즉 전시 설치로 가시화되는순간 우리는 오히려 그 꿈에 다시 억압되기도 한다. 그것이 발화되기 직전까지 우리는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꿈’만으로 발화되어 재생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그 단어들에 더욱 절박하게 매달려야할 것만 같기도 한 다소 초자아적 명령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 방법이랄까, 무대화시키는 방법은 라캉적 의미에서의 ‘응시’ 혹은 ‘목소리-응시’의 차원을 드러내는 것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꿈 혹은 욕망이 갖는 양가적 측면이 전시-무대화되면서 분명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가령 ‘양가성이 분명해진다’, 혹은 ‘왜곡상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등의 이야기가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설치 공간에서의 관객 체험이란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전시장에서는 명확하게 발음되어 제각각의 목소리로 녹화된 수 십 개의 꿈들(인터뷰어의 숫자와 상관없이 대답은 수 십 개로 집약된다)이 ‘꿈’소리 만을 반복 재생된다. 이들은 역으로 (대답한) 우리를 (의식적으로 발화시킨) 꿈 혹은 (무의식적으로 꿈꾸는) 욕망의 실체들로써의 목소리들에 노출시킨다. 그래서 이 공간을 우리는 (목)소리-응시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소리들의 과대/소진술
과연, 애초의 프로젝트 취지로 돌아가서 볼 때, 이 목소리를 오브제화하여 무대화시킨 공간에서, 우리의 꿈은 무엇인지 되물을 수 있을까. 물론 김영섭의 질문대한 대답들이 있다. ‘가족’ ‘돈’ ‘행복’ ‘조화’ ‘건강’ ‘자유’ ‘작가’ ‘교수’ ‘직업’ ‘결혼’ ‘여행’ ‘믿음’ ‘권력’ ‘백인’ 등등... 다양한듯하지만 때로 획일적으로 보이는 이 꿈-단어들은, 이제 (목)소리-응시라는 체계 속에 편입되어 어떤 과도한, 혹은 부족한 진술을 한다. 우리의 수많은 꿈들, 심지어 알 수 없는 어떤 무의식적, 잠재적 꿈들, 욕망들, 우리의 충동들, 새로운 꿈들은 이렇게 한 단어로 발화되기엔 어딘가 과잉이 있고, 혹은 부족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발화시킨 상징체계의 무의식의 틈새들을 노출시키면서 그 반복을 통해 거기에 붙어있는 충동들의 리비도를 노출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목)소리-응시 공간에서 새로운 어떤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 무엇’의 차원, 리비도의 차원을 가늠할 수 있지는 않을까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새로운 무엇이란, 결국 이 단어들로밖에 발화될 수 없는 꿈에 찰싹 붙어있는 다른 잉여-소리들의 차원에 있을 것이다. 이 잉여-소리들의 차원에 대한 기대 혹은 충동의 경험으로부터 나는 앞서 말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염원들’에 대한 ‘리비도’를 가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 리비도란 바로 (목)소리의 내용에 붙어있는 어떤 현실 바깥 혹은 무의식적 증상들을 노출시키는 강렬한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단지 염원자체를 이루려는 열망이라기보다는 그 염원들의 강도에 비례/반비례적으로 반복되고있는 증상들이 노출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강도가 강할수록 우리의 염원은 역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반복임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그 반복자체로부터, 그 반복에 붙어있는 리비도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억압된 한 단어로밖에 발화시키지 못하는 어떤 염원들 이상의 더한 욕망 혹은 충동들을 부추길 리비도의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계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작가란 존재는 마치 김영섭처럼 우리 삶을 채집하고, 그것을 무대화하고, 그를 통해서 왜곡된 거울상을 경험토록 하기도 하고 (시각적, 청각적) 응시의 장을 형성하기도 하는 매개자이다. 이번 김영섭의 전시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충동(가능성)의 현장에서 현실적 꿈의 바깥을 돌이켜 볼 수 있고, 그 반복 자체에 찌꺼기처럼 끈적하게 붙어있는 증상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흔히 ‘꿈’이라고 부르는 그 오브제들은, 항상 지연되어 왔고, 누락되어 왔고, 잉여로써 존재해 왔던 어떤 것이다. 김영섭의 이 꿈을 소재로 한 (목)소리 설치는 아마도, 이러한 왜곡상을 만들어내는 (불)투명한 거울이자, 불편한 반성이자,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한 틈새를 열어 재끼는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병희 / 미술 비평, 갤러리정미소 아트디렉터




작품설명

스피커케이블로 제작한 회분형태의 오브제에서는 약 200여명의 서울시민에게서 인터뷰한 그들의 꿈이나 소원이 울린다. 몇 십개의 유사한 단어로 울리는 수많은 도시인의 꿈은 각자 개인의 꿈이라기보다는 도시사회의 제도나 문화가 만든 꿈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화분형태의 오브제와 스피커는 현대도시인의 꿈이나 소원이 시스템화 되어진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비유한다. 이 프로젝트는 도시와 그 도시의 시스템(제도나 관습, 정보, 문화)이 우리의 정서나 사유에 어떠한 형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꿈'을 통해서 관찰한다.

김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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